비타 엠과 친구 심문섭
2023. 05. 01
세상을 떠난 친구를 생각하며

2023. 05. 01
세상을 떠난 친구를 생각하며
1963년 나는 어머님의 권유에 못 이겨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의예과 2년간, 아르바이트한답시고, 내 공부보다 초롱 같이 맑은 중 3년 아이들의 일류 고등학교 합격에 전력을 다하여 성공하였지만, 본과 초입의 성적이 생각보다 밖으로 밀려있었다. 고단한 몸으로 본과에 진급하니 보통의 고충이 아니며, 갑작스러운 본과 수업의 긴장에 불안증이 증대되어 몸이 갑자기 쇠약해져 드러눕게 되었다. 어서 회복되어 학교엘 가야 했고, 집안의 기둥이 무너진다 생각하니 병세는 악화되고 마음은 더더욱 초조해져 있었다.
이런 와병 중에 친구 심문섭 군이 어느 날 우리 집을 찾아와, 주머니 속에서 주섬주섬 무슨 약병을 내놓으면서, “이 약이 피로와 전신 쇠약에 좋단다. 꼭 먹고 하루빨리 회복하여 학교에서 다시 만나자”고 눈물 어린 위로를 주었다. 무슨 약인지도 모르면서, 친구가 집에까지 찾아와 손에 쥐어 준 걸 열심히 먹었다. 정말 시간이 흐르고 날이 갈수록 몸이 가벼워지고 두통도 없어지며 피로가 가시고 몸이 점차 회복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여 복학하고 학교 성적도 기대만큼은 안 되어도 따라 갈 수 있어, 졸업 후 모교 병원에서 인턴과 이비인후과 전공의 수료 후, 전문의로 해군에 자원하여 군의관으로 폼 나게 군 복무를 다할 수 있었다. 군 복무 중 소령 심문섭을 제대 1년 전, 진해 해군통제부에서 다시 만나 재미있게 지냈다. 체격도 유달리 크고, 입담도 좋았던 친구는 진해에서 유명한 일반외과 군의관으로 이름이 나있었다.
제대 후 친구는 일반외과, 나는 이비인후과 전임강사로 각각 부임하여, 근 32여 년을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과만 다를 뿐, 교수 연구동 7층, 8층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강의하고, 연구하여 모교와 병원 발전을 위해 손을 잡고 일하였다. 그러니 자연히 형제처럼 지내고, 피부과의 권경술 교수가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동기로서 삼총사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학교와 병원 일도 같이하여, 정말 뜻깊은 나날을 보냈다. 두 친구 모두 나보다 더 훌륭하였으나, 어찌 되어 내가 병원장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도 두 친구는 커다란 기둥이 되었고, 두터운 방패막이가 되어주어, 그 엄청난 파도의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시기를 무난히 견뎌낼 수 있게 되었다. 한때 권 교수는 약국장을 겸하고, 응급의료센터 건축 중에는 심 교수가 건설 책임자를 보임하여 너무나도 튼튼하고 만족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심 교수는 그때 남 먼저 출근하여 건설 현장을 점검하고, 인부들을 격려하여 시멘트 타설 작업 때에는 못 하나, 나무 조각 하나라도 섞이지 않도록 하여, 건설 현장 소장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꼼꼼하게 책임을 다했다.
우리는 하루가 끝나 퇴근길에 우연히 복도에서 만나지면, 누군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고등학교 동기생 부인이 경영하는 자갈치 모 식당에 가서 소주 한 잔 따르며 우정을 다졌다. 어떤 때에는 점심시간에 심 교수가 전화가 와서 같이 은행에 가자고 하여 가면, 한 손에 쥔 작은 손가방에서 얼마인지 모르는 돈 뭉치를 입금하곤 하였다. 산부인과를 개업하고 있는, 아내인 한(韓) 선생의 전날 수입금을 입금하는 것이란다. 친구는 세심하여 이제에 대해 배울 바가 많았다. 그래서 병원 새마을 금고 이사장을 맡겼을 때, 직원들의 예금액도 늘어났고, 예금 이자율도 높았으며, 금고 이익금의 배당도 많아져 회원들 모두가 정말 좋아하였다. 그렇게 평일 점심시간에 같이 밖으로 나갈 때 점심값을 꼭 친구가 부담하였다. 내가 내려고 아무리 우겨도 친구는 “지금은 내가 너보다 형편이 좋으니 우리가 대학에 근무 중에는 내가 내고, 퇴직 후에는 그때 가서 네가 내도록 해라”고 변명하여 늘 심 교수가 부담하였다.
2005년 4월 1일은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개교 50주년 기념일이었다. 그때 필자가 기념사업추진단장을 맡아, 학장이셨던 김용기 교수님과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발전재단 차기 이사장 으로 선임된 심 교수와 함께 백방으로 동문들을 방문하여 귀하디귀한 사업비를 마련하였다. 국제학술대회, 50년사 편찬, 기념행사 등 수많은 곳에 아낌없이 경비를 지출하되, 헛되이 사용하는 곳이 없도록 세심하게 돌보고 관리 감독해준 심 교수께 지금 다시 감사드린다. 그때의 잉여금에 대해 많은 곳에서 손을 내밀었으나, 그것은 의과대학 동문들의 피땀 흘린 것으로 함부로 내줄 수 없는 것이란 판단에 발전재단으로 이관하였다. 심 교수는 동문회관을 마련하려고 부산 시내 곳곳을 백방으로 다녔으나, 적은 돈으로 엄두를 못 내고 우선 부지라도 마련하기 위해, 응급의료센터 맞은편에 있는 단독주택을 돈에 맞게 샀었다. 최근에 듣자니 새로 부임한 동문회장님이 회관 건립에 심혈을 기울리고 있다 하여, 저승에서 듣고 있을 심 교수의 영혼이 다소 편안한 마음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토록 의과대학 동문회관 건립은 심 교수가 생전에 걱정했던 일이었다 .
2010년 2월 26일(금요일), 늦은 시간에 아래층에서 연구실 문을 닫고 열쇠를 잠그는 소리를 듣고 쫓아 내려가니, 심 교수가 문을 닫고 있었다. “조금 전에 네 방에 가서 작별 인사를 했는데 왜 내려왔느냐?” 묻기에, “한 번 더 보려고......” 대답하고 둘은 헤어져, 3월 2일부터 나는 지금의 한서병원에서, 심 교수는 부산의료원 노인병원장으로 가서 일을 하게 되니 만날 기회가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한 달에 한두 번씩 전화하고, 제자들의 home coming day 때나 겨우 만났고,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던 중, 심 교수는 당뇨병을 앓으며, 의료원을 그만두고 이곳저곳 병원에서 치료받느라 서로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몸이 아파서 그랬겠지만, 행여 영도에 갈 일이 있어 전화로 “문섭아, 오늘 내가 우리 어머니 뵈러 갈 일이 있는데, 그 후 잠깐 만나 얼굴이라도 좀 보고 이야기도 나누자”고 하면, “그래, 나는 괜찮다. 다음에 만나자”며 사양하던 것을 지금에 생각하면, 본인이 가진 병이 자신의 마음이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어, 친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이토록 미안하고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어 한탄스럽다. 친구의 병이 심해진 걸 빨리 알아차리고 비타 엠이라도 사서 갔더라면 어떠했을까?
심 교수는 누구보다 명석하였고, 부지런하고, 빈틈이 없었으며, 남의 어려움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어렵고 힘든 일은 먼저하고,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은 언제나 남에게 양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더더욱 필요한데, 주님은 착한 사람을 어려운 이곳에서 먼저 당신 곁으로 불러올리시는 양, 아직도 친구가 할 일과 돌봐야 할 환자와 이웃들이 많은데, 당신 곁으로 불러, 그동안, 이 세상에서의 노고를 칭찬하고 돌보아 주시고자 먼저 불러 우리 곁을 떠났지 싶다.
문섭아, 미안하다. 대학을 떠난 후 그런대로 잘 지내리라고 생각하고 미뤄왔던 만남을 이루지 못하여, 정말 정말 죄송하고 한스럽다, 저세상에서 그간의 노고를 풀며 편히 지내기를 기도 드린다. 그럼 잘 있어라 친구야, 또 만나자.
2023. 06. 27.
한서병원 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