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종합국립대학교,
부산대학교 설립 이야기
1946년 5월 15일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국립대학교인 부산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는 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가 종합대학교로 승격한 1946년 8월 15일보다 앞선 시점이며, 서울대학교 설치령이 제정된 8월 22일보다도 3개월이 빠르다.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라는 혼란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부산대학교는 대한민국 고등교육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설립의 중심에는 당시 경상남도 학무과장이었던 윤인구가 있었다. 그는 미군정 관계자들과 협의하여 한·미 양 문교부장의 최종 승인을 이끌어냈고, ‘국립 부산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의 첫발을 내딛게 했다. 개교 당시에는 인문학부와 수산학부 두 학부만이 설치되었다.
초기 총장으로는 미국인 베커가 1946년 부임하였으나 1년 만에 귀국하였다. 이후 학교 설립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온 윤인구가 1953년 정식 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제1대 총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의 리더십은 이후 부산대학교가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대학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1948년 수산과대학과 인문과대학이 각각 분리되었고, 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은 캠퍼스 운영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문현동 부지는 육군이, 충무동 부지는 영국군이 점령하였으며, 서대신동 교사 역시 피난민 수용 시설로 사용되었다. 학교는 천막 생활을 이어가야 했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수업은 멈추지 않았다. 배움을 향한 열망이 대학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후 수산과대학은 ‘국립부산수산대학’으로, 인문과대학은 ‘국립 부산대학’으로 분리·확정되었다.
전환점은 장전동 부지 확보였다. 윤인구 초대 총장은 당시 유엔군 부산군수 사령관이었던 위트컴 장군을 만나 협력을 요청했고, 대한미군원조처(AFAK)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약 50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부지를 확보하면서 부산대학교는 비로소 안정적인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미 공병부대가 도로 개통과 공사를 도왔고, 암석과 잡목이 무성하던 황무지는 점차 학문의 공간으로 변모해 갔다. 이곳은 조선시대 말기에 동래부 사형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많은 분묘가 있었다고 한다.
1953년 종합대학교로 승격한 부산대학교는 이듬해 장전동에서 교사 신축 기공식을 거행하며 ‘효원’ 시대를 열었다. 1956년 공과대학 본관과 도서관, 박물관이 들어섰고, 1959년에는 오늘날 부산대학교의 상징인 대학본관이 준공되었다.
윤인구 총장은 어느 날 새벽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교지를 ‘효원(曉原)’이라 하였다. 새벽 효(曉), 들 원(原), 문자 그대로 ‘새벽이 밝아오는 들판’을 뜻하며,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깨달음의 공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지난 어둠의 시대를 지나 새날을여는 교육의 터전이라는 철학이 담겨있는 것이다.
초기의 통학 환경 또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다고 한다. 버스는 하루 두 편에 불과했고, 전차 역시 범일동까지만 운행되었다. 결국 학교는 화물트럭을 통학용으로 운행했다. 교수와 학생이 구분 없이 함께 올라타 흙먼지를 날리며 오가던 그 모습은, 시대의 어려움 속에서도 배움을 향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부산대학교의 역사는 단순한 대학 설립의 기록이 아니다. 혼란과 전쟁, 그리고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도 교육의 가치를 지켜낸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의 역사이다. 1946년 작은 출발로 시작된 부산대학교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립대학교로 성장하였다. 그 출발점에는 언제나 ‘최초’라는 자부심과 함께, 시대를 넘어 이어진 교육에 대한 신념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