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학교병원
생명사랑 2025. 여름호
VOL.259
PNUH 보감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정주
27대 부산대병원장
15대 부산보훈병원장
비뇨의학과교수
부산대학교 27대 부산대병원장 이정주
전임강사의 집은 초량이 아니고 바로 이 아미동 1가 부산대학교병원이며 봄, 여름, 가을, 겨울 세월이 가는 것을 몰라야 한다

모과 당직실 청소와 담배심부름으로 시작된 인턴 생활은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그 당시는 인공호흡기가 몇 대 안되었기에, 인턴이 coma 환자 앰부를 잡았다. 밤늦은 시간까지 끝없이 앰부를 잡고 있는데, 앰부 잡는 태도에 영혼이 없다고 가슴팍 한가운데 펀치가 박히곤 하였다. 당시는 응급의학과가 없어, 응급실을 인턴 4명이 1조로 한 달간(인턴 2명씩이 격일로 24시간 맞교대 형식으로) 근무했다. 응급환자를 미숙하게 처리했다고 각과 전공의로부터 인격 모독성 나무람과 린치를 당할 때면 ‘이제 진짜 이 짓을 그만두어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결심했다가 밤늦은 시간 인턴 숙소에 통닭을 시켜두고, 서로 둘러앉아 특정 병동의 그 간호사, notorious 모과 전공의 1년차를 안주 삼아 씹을 때의 내일은 전공의 1년차였다. (1986. 3.)

대망의 붉은색 ‘비뇨기과’ 명찰을 단, 전공의 1년차는 인턴 때 생각하던 것과 전혀 달랐다. 비뇨기과 의국은 동향이었다. 새벽녘까지 환자 드레싱, 차트 정리, 기타 모든 의국의 잡다한 일을 처리하다 보면 어김없이 붉은 태양이 떠올랐었다. ‘아! 저 해가 떠오르면 한잠도 못 자고, 또 다른 24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전공의 1년차의 내일은 전공의 2년차였다. (1987. 3.)

과장님의 엄명으로 어설픈 1년차 대신, ‘2년차 중심의 의국’이 발효되었다. 수술 및 진료 보조를 모조리 책임져야 했다. 게다가 주말이면 각자의 석사논문까지 준비해야 했는데(내 경우는 과장님의 기분이 언짢으셨는지) 석사논문 제목이 갑자기 ‘최근 10년간의 신결핵의…’ 에서 ‘개원 이후 신결핵의 임상적 고찰’로 바뀌었다. 당시 차트를 보관하던 의무기록실은 지금의 세탁실 쪽 지하에 있었다. 저마다의 무수한 안타까운 사연을 안고, 유명을 달리한 많은 환자의 혼이 머문다는 곳이었다. 아무도 없던 캄캄한 밤, 깨진 창문 틈 바람에 흔들리는 호롱불 같은 전구 밑에서, 먼지로 뒤덮인, 색색깔로 표시된 봉투 속 차트를 외로이 악착같이 찾아야만 했었다. 높은 사다리를 타고 차트를 찾다 보면, 기우뚱 기우뚱 흔들리는 책장 선반에 압사당할 위험을 직면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의 내일은 아미동의 밤황제 전공의 4년차였다. (1988. 3.)

전문의시험이 바야흐로 내달인데, 약속된 전공의 의무 논문 8편을 모두 완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장님이 원저 논문 학회 제출 허락을 안 해 주신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어서야 학회 편집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논문 우선 접수 신청을 하고 ‘논문 게재 예정증명서’를 받았다. 한 달도 채 안 남은 전문의 시험을 대비해 벼락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몇 달 전부터 전문의 기출문제와 왕족보를 줄줄 외우고 있는 다른 병원 4년차의 입이 그렇게 크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때의 내일은 봉황새 양쪽에서 춤추는 검은빛 전문의 명패였다(다시는 아미동 쪽으로는 소변도 보지 말자고 다짐에 다짐을 했었다). (1990. 12.)

드디어 무급 펠로 6개월만에, 모병원 비뇨기과 과장이 되었다. 주변에서 “과장님”, “과장님”해서 어깨에 힘이 만빵으로 터져나갈 때였다. 호사도 잠시, 그 어려운 비뇨기과 전임강사의 T.O가 갑작스럽게 기적 같이 나왔다. 주임교수님의 연구실로 바로 오라는 벼락 같은 호출이 있었다. “Dr. Lee!, 집이 어딘가?” (아! 첫날이라 일찍 집에 보내주실 모양이다.) 공손히 손을 모으고 “예, 초량동에 살고…” 채 말이 끝나기 전에 마른하늘에 천둥번개가 친다. “뭐라? 초량?, 전임강사의 집은 초량이 아니고 바로 이 아미동 1가 부산대학교병원이다. 알겠나!”, “어디 썩어빠진 정신 머리를 가지고… 그래서 일이 되겠나?” 참담히 돌아서는 나에게 다시 부드럽게 물으신다(아! 그렇게 야단을 치시니, 그래도 역시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이구나). “Dr. Lee!, 오늘이 몇 월 며칠이지?”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가다듬어 “예, 오늘이 7월 20일…” 역시 대답이 끝나기 전에, 아까보다 훨씬 큰 뇌성이 다시 터질 듯 전 연구실 복도를 울린다(7층 복도에 어디서 불이 났나? 하면서 여러 교수님들이 다 나오셨단다). “이것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어디서! 전임강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세월이 가는 것을 몰라야 한다. 전임강사가 시간 가는 것을 알고, 낮, 밤을 구별하면 그 의국은 망한다. 알겠나? 명심해!” 돌아서 나오는 내 눈동자에는 한없는 절망감이 맺힌다. (1991. 7.)

구포열차 전복사건의 응급수술을 위해 외과계 교수 총동원령이 떨어져, 분주히 밤새도록 이방 저방 부지런히 건너뛰며 수술하던 일

의약분업 반대파업으로 우리 모두가 일괄 사표를 던진 후에, 인턴, 레지던트 없이 밀려드는 환자를 보며 응급실을 한없이 지키던 일

미국유학시절, 고양이보다 더 커진 실험 쥐에 물려, 혹시 페스트 병이라도 생겨 잘못되는 것 아닌가? 내가 할 일이 없어 이 머나먼 이국 땅에서 이렇게 쥐에 물려 가는구나 하며, 콜로라도의 달보다 더 큰 Palo Alto의 추석 달을 보며 명절을 보내던 일

조교수 시절, 새로운 요실금 TVT 수술법의 창시자 스웨덴의 움 테드 교수님이 한국에서 최초로 내게 수술을 가르쳐 주던 일

부교수 시절, 복강경수술을 배우러 일본 오사카대학 기숙사를 새벽같이 나서, 오사카, 나라, 쿄토를 돌며, 하나라도 더 수술을 눈에 담으려고 동분서주 후, 늦은 밤 아무도 없는 텅 빈 기숙사 냉기를 온몸으로 대하던 일

주임교수 시절, 뉴질랜드 타우랑가의 시골까지 가서 새로운 전립선수술인 홀렙 수술을 배우고 왔는데, 막상 귀국해서 내가 직접 수술을 하려 하니 도무지 피만 나고 시간만 가서 진퇴양난으로 고생하던 일 ….

요실금 TVT 2000례 달성, 홀렙 수술 3000례 달성 후(홀렙 수술 국내 메카 부산대 비뇨의학과), 대한민국 최초 전립선암 복막외 복강경수술 시행, 부산대병원 로봇수술의 선진화 달성, EBS 명의 출연, 부산대병원 의료질 평가 1-가 등급 달성, 부산대병원 흑자 전환, 응급실 A등급 확보….

인턴, 레지던트,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시절 그토록 간절히 고대하고 온몸으로 열망하던, 어제의 내일인 오늘은, 비뇨기과 주임교수, 대한배뇨장애요실금학회장, 대한비뇨기과 학술이사, 부산대병원 기조실장, 27대 부산대 병원장, 15대 부산보훈병원장 시절에도 코로나 창궐, 의대증원 의료대란…. 여전히 더 큰 어려움과 더 거대한 난공불락으로 한결같이 정확히 반복되었다.

그 때는 몰랐다. 그토록 힘들고, 땀과 눈물로 온몸이 젖던,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인 것을….

이제 40년 정든 부산대학교병원을 떠나려 한다. 부족한 사람, 오늘의 이 순간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여러 선후배 동료 에게 한없는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