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역사의 중심,
동래 이야기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에 맞선 주요 격전지였으며,
이후 초량 등지에 왜관이 설치되면서 대일 외교와 무역을 관장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일본은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도시를 발전시켰다. 동구 범일동 일대에 조선방직을 설립하고 서면까지 도심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1914년 일제는 한국인이 주로 거주하던 동래를 부산부에서 제외하고 기장군과 통합하여 ‘동래군’으로 격하·분리했다. 이 시기 동래읍성의 성벽이 철거되어 도로가 개설되었으며, 동헌은 관공서로 전락하거나 훼손되었다. 반면, 동래온천은 일본인을 위한 대규모 위락 시설과 고급 여관이 들어서며 근대적인 관광·휴양지로 소비되었다. 노면전차의 종점이 온천장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현재의 동래별장과 농심호텔 자리가 바로 그곳이다.
945년 해방 직후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 귀국한 수많은 동포가 교통이 편리하고 빈터가 많았던 동래 일대로 유입되었다. 귀환 동포들 대부분은 연고나 생계 대책이 없고 고향으로 갈 교통수단마저 부족하여, 고향이 있어도 가지 못하는 처지였다.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동래역 주변과 온천천 일대, 금정산 자락 등 평지와 산기슭에 피란민들이 지은 판자촌과 천막 수용소가 대규모로 형성되었다. 당시 동래의 대형 여관과 온천 시설들은 전시 부상병을 치료하는 육군병원이나 군 지휘 시설로 징발되어 사용되었다. 동래별장은 부통령 관사로 쓰였으며, 일부 권력자와 자산가들은 전쟁 중에도 온천의 요정에서 향락을 즐겼다. 전쟁이 끝난 후 1957년 부산시에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공식적으로 ‘동래구’가 출범했다.
1960년대 동래온천은 현대식 호텔과 여관들이 확충되면서 전국의 신혼부부들이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1966년 금강공원에 부산 최초의 로프웨이(케이블카)와 위락 시설이 갖춰지면서 주요 유원지로 기능했다. 부산의 도심이 서면과 온천천 일대로 확장됨에 따라 동래 지구에도 대대적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되었다. 온천천 주변과 부곡동 일대에는 대규모 제직 및 섬유 공장들이 들어섰다. 특히 금성사(현 LG전자) 온천동 종합 전자 전기 공장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흑백 TV와 냉장고를 생산하기도 했다. (이 부지는 ‘동래 럭키아파트’가 된다.) 아울러 부산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대학가를 형성했으며, 동래고등학교를 비롯한 전통 명문 학군과 신설 학교들이 자리를 잡으며 교육 중심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1970년대 동래는 부산의 급격한 인구 증가를 수용하며 신흥 명문 주거지로 바꿈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과 명문 학교들의 이전이 맞물리면서 주거 및 교육 중심지로서의 위상이 더욱 강화되었다. 1979년 온천동에 건립된 ‘동래 럭키아파트’는 중앙집중식 난방 시스템을 도입한 부산 최초의 대단지 아파트로, 정·재계 인사와 전문직 종사자들이 대거 입주하며 대표적인 부촌을 형성했다. 교통 면에서는 1973년 제1만덕터널이 개통되면서 북구(덕천, 구포) 지역과 동래를 연결하는 간선 도로망이 확충되었다. 이와 함께 온천장 주변은 대형 요정과 상업 유흥 시설이 결합하며 대규모 소비 중심지로 성장했다.
이처럼 동래의 역사적 변천사는 전근대 시기의 군사적 방어기지가 근대 식민지기의 수탈과 전쟁기 피란처라는 공간적 왜곡을 거쳐, 현대의 주거·교육·상업 중심지로 재편되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시대적 요구에 따라 동래의 공간적 기능은 끊임없이 변화해 왔으나, 부산의 중심축으로서 지녀 온 역사적 상징성은 여전히 현재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