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막 인턴 생활을 시작할 무렵, “소아는 수액 줄만 정리해 줘도 잘 낫는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소아청소년과를 지원했다. 어리고 건강한 생명체는 스스로 치유하는 힘이 강해 회복도 빠르니, 치료하는 의사 입장에서도 큰 보람을 느낄 수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26년여간 소아 환자를 진료하면서 보니, 선배의 그 말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의사는 지금까지 축적된 임상 경험과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환자를 치료한다. 그러나 똑같은 치료를 해도 어떤 환자는 호전되고, 다른 환자는 반응이 적을 때가 있다. 그렇다면 결과가 좋아야만 실력이 있고, 결과가 나쁘면 실력이 부족한 의사일까? 한 환자에게 최신 치료법을 미처 알지 못해 고전적인 방식을 썼는데 호전되고, 최신 치료를 적용했는데 오히려 부작용을 보였다면? 과연 어떤 의사가 좋은 의사인지 묻게 된다. 결국 진료실은 다양한 변수 앞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자리가 된다.
아툴 가완디는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서 더 나은 의료를 만드는 세 가지 태도로 성실함, 올바름, 창의적인 개선을 이야기한다. 책을 읽으며 인턴 시절 첫 근무지였던 외과계 중환자실이 떠올랐다. 당시 폐렴으로 인공호흡기 치료를 받던 한 할아버지의 욕창 드레싱을 맡았다. 상처가 커서 쉽게 회복되기 어려워 보였다. 초보 인턴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침저녁으로 상태를 살피고 상처를 세척한 뒤 정성껏 드레싱하는 것이었다. 3주 뒤 나는 다른 과로 옮겼다. 몇 달 후, 혼수상태셨던 그분이 아들과 함께 걸어와 작은 선물을 건네며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이 일은 의사로 지낸 시간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의 하나로 기억된다.
“수액 줄만 정리해 줘도 낫는다”던 선배의 말은, 환자 옆에서 엉킨 ‘수액 줄까지도’ 세심히 살피는 기본적인 의사의 태도를 뜻한 것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19 등 전 세계적인 감염병 대유행을 거치며 손 씻기는 전 국민의 상식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둔감해지고 손 씻기를 잊곤 한다. 병원 내 감염을 줄이기 위해 마스크 착용, 청소와 소독, 신속한 격리, 일회용 혹은 멸균 기구 사용, 의료진 교육을 시행하더라도 손 위생을 소홀히 하면 감염은 커질 수 있다. 기본은 단순하지만 바쁜 순간에도 반복해 지킬 때 힘을 발휘한다.
아툴 가완디는 의사의 일을 야구 수비에 비유한다. 뛰어난 선수도 실수하듯 숙련된 의사에게도 불리한 결과가 생길 수 있다. 나 역시 진료과정에서 소송을 겪었고,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면 지금도 긴장한다. 그렇다고 결과를 운명 탓으로 돌리거나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결과를 모두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과 판단하고 설명할 책임은 별개의 문제다. 신앙인으로서 치유의 최종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되, 의사로서 최신 근거와 환자의 상황을 살피고 해로움보다 이득이 큰 선택을 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책의 마지막에는 더 나은 의사가 되기 위한 다섯 가지 제안이 나온다. 그중 지금 실천하고 싶은 것은 세 가지다. 먼저 질병과 처방만 묻는 데서 멈추지 않고 환자나 동료의 일상을 이해할 질문을 하나 더 건네려 한다. 또 불평으로 진료의 피로를 키우기 보다 동료와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한다. 마지막으로 작은 개선을 직접 시도하고 그 결과를 확인하려 한다.
소아청소년과의 현실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아이들이 생애 초기에 만나는 의사이며, 아이들이 아픔을 이겨내고 자라도록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제도를 한 번에 바꿀 수는 없어도 오늘의 진료는 바꿀 수 있다. 내일도 손을 씻고, 환자의 말을 한 번 더 듣고, 해야 할 기본을 빠뜨리지 않으려 한다.
아툴 가완디(Atul Gawande) 지음 · 곽미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